한자 |
뜻 음 |
내 용 |
비고 |
1. 齋 |
재계할 재 |
재 - 공경, 엄숙, 공손 |
불교 의식 |
2. 齊 |
가지런할 제 |
제 - 갖추다 |
기원 의식 |
3. 祭 |
제사 제 |
제 - 제사, 신과의 접촉,
사귀다 |
기원, 축제 |
● 49재(四十九齎), 천도재(薦度齋=법도(法度)로 추천하는 의식) : 불교식 탈상
불교 상례(喪禮) 중 가장 특이한 것이 불교식 탈상(脫喪)이라 할 수 있는 49재이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의식이다. 요즈음은 49재 후 탈상을 하기 때문에 중시되며, 가정에 빈소를 차리지 않고 사찰에서 49재를 모시면서 빈소 역할까지 겸하므로 대부분의 불자들이 실천하고 있다.
49재는 불교에서 지내는 천도재(薦度齋)의 하나로서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스님께 올리는 공양이나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공의식을 ‘재’라고 한다. 불가에서 지내는 천도재 중 가장 잘 알려 진 것이 바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49일 동안 기도하는 49재이고 그 밖에도 100일재·소상·대상 등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7일째 되는 날부터 49일째 되는 날까지 매7일마다, 그리고 100일째와 1년째, 2년째 되는 날 이렇게 모두 합하여 10번을 명부시왕으로부터 한번씩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중에서 49재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명부시왕 중 지하의 왕으로 알려진 염라대왕이 심판하는 날이 바로 49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49재만큼은 꼭 치렀다.
불교에서는 명부세계(冥府世界)를 관장하는 시왕(十王)의 심판 및 형벌과 관련시켜 7일마다 재를 지내는데 이는 명부가 고통이 매우 심한 곳이고, 10대왕은 고통받는 명부의 죄인을 관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불교와 도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10대왕의 관용을 빌기 위해 초7일, 2.7일, 3.7일, 4.7일, 5.7일, 6.7일, 7.7일과 100일째 되는 날, 1주기, 2주기 때 이렇게 열 번의 재(齋)를 지내도록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앞의 일곱은 49재, 뒤의 셋을 백재(百齋). 소상재(小祥齋). 대상재(大祥齋)라 칭한다. 이와 같이 각 대왕들이 49일 중 매 7일마다 한번씩 죽은 이가 지은 생전의 업을 심판하여 벌과 상을 주므로, 그날마다 재를 지내줌으로써 부처님의 가피 아래 벌을 면하고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의식절차에 따라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와 각배재(各拜齋)·영산재(靈山齋) 등으로 나뉘는데, 이 중 상주권공재가 가장 기본적인 의식이며, 여기에 명부신앙에 대한 의례를 더한 것이 각배재이고 번화신앙을 가미한 것이 영산재이다. 특히 영산재는 의식이 장엄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와 같은 천도재는 일반적으로 사찰의 명부전에서 치른다.
● 경전 근거
사십구재에 관한 전거(典據)는 지장경에서 찾을 수 있다.
‘지장보살님이 말씀하시되, 장자여 내가 지금 미래 현재 일체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위력을 이어서 간략히 이 일을 설하리라. 장자여 미래 현재 모든 중생들이 명을 마칠 때 다달아서 한 부처님 이름이거나, 한 보살의 이름을 얻어 듣게 되면 죄가 있고 없음을 불문하고 다 해탈을 얻으리라. ...중략...
죽어서 모든 이가 7.7 49일 안에는 업보를 받지 않았다가 49일이 지나면 비로소 업에 따라 과보를 받나니, 만일 죄인이 이 과보를 받으면 천백세중에 헤어날 길이 없나니 마땅히 지극한 정성으로 49재를 베풀어 공양하되 이같이 하면 목숨을 마친 이나 살아 있는 권속들도 함께 이익을 얻으리라’
라는 구절을 비롯하여 법화경(法華經) 사상과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여래경(藥師如來經) 등의 사상에 근거해서 봉행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교의 윤회관이 중국의 시왕사상과 결합하면서 나타난 의식이다.
이와 같은 사십구재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동시에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의식으로 자리 잡아 생명존중과 조상공경의 의식으로 발전케 되었다.
● 49재 의미
불교에서는 칠칠재를 올리는 이 49일간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에 죽은 이가 생전에 행한 선과 악을 바탕으로 다음 세상에서의 인연, 즉 생(生)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자는 극락으로, 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깨달음을 얻어 윤회고(輪回苦)를 벗어나지 못하면 계속하여 육도(六道)를 헤매게 된다.
해탈하지 못한 이들의 다음 생은 선업과 악업의 심판에 따라 매 7일마다 시왕(什王) 중의 결정되는데 49일째 되는 날에 그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자는 죽은 지 49일 동안은 이미 목숨(命)은 끊어졌을지라도 정신(性)만은 생전 그대로여서 황망히 떠나온 길에 대한 두려움과 온갖 환영에 시달리며 보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망자에게는 비록 생전에는 많은 죄업을 지었지만 이 49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어느 곳에 환생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달려있다.
이런 의미에서 49재는 영혼에게 불법(佛法)을 들려주고 삶의 무상(無常)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더 없이 소중한 의식이 된다. 또한 남아 있는 가족들은 망자를 위하여 부처님께 축원하고 명복을 기원하는 마지막 배려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49재를 지내는 이유는 바로 망자의 다음 생을 위해서다. 이 기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불공을 드리고 재를 올려 선근공덕을 지으면 악업이 소멸되어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으므로 가족들은 매 7일마다 또는 49일이 되는 날 재를 지내 죽은 자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생사의 슬픔을 잊기도 한다.
특히 일곱 번째 재를 막재 또는 사십구재라고 하여 보통 칠일마다 올리는 재는 간소하게 하나 마지막 사십구일이 되는 일곱 번째 올리는 재는 영가가 육도 중 어느 곳으로 태어날지에 대해 심판받는 날이라 크게 치룬다.
● 49재 유래
49재(四十九齋)는 원시불교인 인도의 불교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유교적인 조령숭배(祖靈崇拜) 사상과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이 절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따르면 개인의 생전의 행위 자체에 대한 업보(業報)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자녀 또는 그 후손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가 없으며 전가시킬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교사상은 이 49일 동안에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그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재를 올리면, 죽은 부모나 조상이 후예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조상의 혼령이 후손들에게 복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불교에서도 ‘무아설’과 달리 육도(六道) 사상적 해석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육도, 즉 천상(天上)·인간(人間)·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아귀(餓鬼)·지옥도(地獄道) 등 여섯 세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죽은 가족이 이 중 이른바 삼악도(三惡道; 지옥도·아귀도·축생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는 기도 행위가 49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49재란 불교에서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불경을 외면서 재(齋)를 올려 죽은 이가 그 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제례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칠칠재(七七齋)라 부르기도 한다.
● 49재 절차
49재는 죽음을 맞이한 날부터 계산하여 49일 동안 하게 된다. 흔히 자시(子時: 밤 11시―1시)에 죽은 경우 다음 날부터 산정하여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의아심도 가질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모든 의식을 행함에 음력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시는 다음 날의 시작이다.
실제로 삼일장(三日葬)인 경우 자시에 죽었을 때 다음 날로 시작하여 사흘째 발인(發靷)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이 오해하나 49재는 특이하게도 양력으로 계산하여 비록 밤 11시 45분에 돌아가셨어도 그 날도 삽입하게 된다. 이는 49재가 아마 인도에서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그 날부터 산정하게 된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
재를 올릴 때 스님이 직접 설법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염불의례는 주로 부처님 말씀인 불경을 가지고 독경(讀經)을 한다. 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이 주로 49재에 독송하는 경전이다.
그 내용은 물거품 같은 육신(肉身)과 허상(虛想)에 매이지 말고 참된 자기(自己)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 외에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에게 모든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아미타경과 지장경을 독송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스님의 염불과 독경소리를 듣고 깨달은 영가는 지난 생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부질없이 집착하였던 스스로의 모습을 참회하게 되고, 마침내 삶의 무상을 바로 깨달아 새로운 세계인 환생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일반적인 49재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시련(侍輦) : 동구 밖에서 영가를 맞아들인다.
2. 대령(對靈) : 영가를 간단한 대접을 하여 맞아들이고 휴식하게 한다.
3. 관욕(灌浴) : 불보살을 맞이하기 위하여 영가를 목욕시킨다.
4. 신중작법(神衆作法) : 불법의 도량을 잘 수호하도록 모든 신중을 맞아들인다.
5. 상단권공(上壇勸供) : 불단에 공양을 드리며 법식(法食)을 베푼다.
6. 관음시식(觀飮施食) : 영가를 대접하는 일반 제사의식이다.
7. 봉송(奉送) : 불보살을 먼저 배송(拜送)하고, 영가도 왕생시킨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신자나 종교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모형제가 상(喪)을 당하면 절에서 49재를 올린다. 그러나 막상 절에서 49재를 하면서도 왜 49재를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막연히 돌아가신 사람이 극락왕생(極樂往生)하기를 비는 정도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9재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제사(祭祀), 제례(祭禮)
신명을 받들어 복을 빌고자 하는 의례.
예부터 동양에서는 천지(天地)·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하여 풍사(風師)·우사(雨師)·사직(社稷)·산악(山岳)·강천(江川), 그리고 선왕(先王)·선조(先祖)를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전국의 이름난 산천에는 해마다 국가에서 직접 제사를 올렸으며, 풍수설(風水說)이 강해진 뒤로는 더욱 산천을 중시하여 제를 올렸다. 지금은 제사라 하면 단지 선조에 대한 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하면 선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가옥에서 필수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례는 사후세계의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제사는 사람이 죽어도 혼백은 남아 있으므로 살아 있을 때처럼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조상숭배사상의 유교적 가치관에서 발전해왔다. 〈예서 禮書〉에 따른 한국의 보편적인 제례는 사당제(祠堂祭)·사시제(四時祭)·이제(爾祭)·기일제(忌日祭)·묘제(墓祭)의 5가지가 있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례의 종류는 음력 매월 초하루나 보름 또는 조상의 생일 등에 낮에 간단히 지냈으며, 명절에만 지내는 것으로 바뀐 차례(茶禮), 매년 사망한 날 닭이 울기 전 제주의 집에서 지내는 기제(忌祭), 매년 시월 상달 문중이 모여서 시제답(時祭畓) 비용으로 함께 지내는 시제(時祭)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시제는 묘사로 구분하기도 하며, 차례는 성묘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 제례(祭禮)의 기원
제례(祭禮)는 종교의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여 진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대부분 자연에 의존하여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와 조건은 원시사회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와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였던 원시시대의 인간들은 자연의 변화와 현상을 주재하는 신(神)이 있다고 믿어 그 자연신에게 인간의 안녕을 기원하였는데 이 의식(儀式)이 바로 제례의 기원이다.
따라서 원시시대의 제례는 자연신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례로서 최고 통치권자는 바로 이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었고 제사장은 제사의식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까지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인간의 사고가 발달하면서 자연의 현상에 대하여 과학적 이해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종교는 무조건적인 기복신앙(祈福信仰)에서 인간을 교화하는 최고의 가르침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원시시대의 제례는 종교의례로서 지금 우리가 집에서 지내는 가례(家禮)로서의 제례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원시시대의 제례의 대상은 신(神)이고 주제자(主祭者)는 제사장(혹은 임금)이었으며, 인간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지내는 가례의 하나인 제례의 대상은 조상(祖上)이며 주제자는 자손이고, 부모님에 대한 효(孝)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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